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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나

알렉산드로 푸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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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년 6월 6일 ~ 1837년 2월 1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의 국민 시인.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제일 처음 열었다는 평가를 받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푸시킨의 시를 꼽으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일 것입니다.


알렉산드로 푸시킨은 1799년 모스크바에서

명문 귀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푸시킨의 초상화를 보면 외모가 독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푸시킨의 외증조부가 에티오피아 출신 흑인으로,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된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1696~1781, 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입니다..


아브람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1696~1781, 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



즉, 흑백혼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푸시킨에게 자신의 뿌리는

그저그런 노예출신이 아닌 자랑스러운 학자집안이었어요.


른 사람들은 곱슬 머리에 키 작은 루저라고 놀려댔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 대폭발이라

평생 여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문필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고전 문학들을 접하며 책을 많이 읽었고,


삼촌도 시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유모로부터 러시아의 여러 민담과 민요들을 배웠습니다.


이런 성장 배경은 푸시킨이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동시에,

훗날 푸시킨이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러시아 민중들을 동정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미 10살 때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고,

 12살 때 중,고교 과정이 통합된 러시아 귀족 자제 교육기관

 리쩨이(лице́й)에 입학했습니다.


리쩨이에서 교육받는 동안 130편의 시를 지었고

15세 때 처음으로 시집을 냈습니다.


17살 리쩨이에서 진급 시험을 칠 때

'짜르스꼬예 셸로의 추억'이라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던 문학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푸시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리쩨이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출세 코스에 맞게

외무성에 들어가 8등 문관 신분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워낙 전형적인 생활이었기 때문에

곧 이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이때부터 3년간 향락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당대의 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동참했습니다.


유명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


를 발표한것도 이 무렵.


푸시킨은 이 무렵 러시아의 농노제와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당국의 눈 밖에 나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전근 당했습니다.


오데사에 머무르며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푸시킨은

오데사 총독과 불화를 일으켜 영지인 미하일롭스꼬예로 추방당했습니다.


1825년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이 허용될 때까지,

남부지방에 있을 수 밖에 없었고,

1824년에는 외국 망명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거기다 그와 친분이 있엇던 자유주의자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숙청당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예술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시기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예브게닌 오네긴와 보리스 고두노프

이때 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182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된 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으나

푸시킨은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황제의 검열 없이는

작품 발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


사적인 여행도 일일이 허가받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귀환한 후 얼마간은 서정시나

연애시를 적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1830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는데

1831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결 짓고

여러가지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습니다.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푸시킨의 대표 소설들도 이때 발표된 것들입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설정한 희곡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썼고,

그것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1898년에 오페라화를 했습니다.


이것이 1979년에 쓴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

영화화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이렇게 더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1831년,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에게 청혼했습니다.



나탈리야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



곤차로바는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자신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남성과 사별한 유부녀습니다.


곤차로바는 미인이었지만 워낙 그녀에 대해 사생활이 문란하고

음탕하다는 등의 뒷소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푸시킨의 어머니는 곤차로바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푸시킨은 곤차로바와의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 무렵 푸시킨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곤차로바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자식들로는 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딸 마리아, 나탈리야로,

나중에 막내딸 나탈리야의 손주들이 왕가의 후손과 결혼하게 됩니다.


곤차로바는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 중에는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1834년에 푸시킨은 차르의 시종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 곤차로바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음흉한 속셈 아니냐는 소문이 당대부터 돌았습니다.


푸시킨은 이런 소문에 처음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한편, 엄청난 노름꾼이자 결투광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에 더해 사치를 좋아하던 아내 때문에 빚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1836년 11월, 푸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아내 곤차로바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니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게 됩니다.


푸시킨은 당시 곤차로바와 가까워진 프랑스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가 범인이라고 확신했고 당테스에게 결투 신청을 합니다.


하지만 당테스와 처제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푸시킨과 당테스는 결국 결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어 쓰러지게 됩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당테스에게 반격해 그에게 부상을 입히긴 했지만

당테스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푸시킨은 이틀 후 사망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푸시킨은 결투에서 습니다.


푸시킨은 자신의 서재에 꽂혀있던 수천 권의 책을 생각하며


"안녕, 친구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이 곧 친구라는 말이지요.


이로서 곤차로바는 또 사별하고 맙니다.

만 24살에 불과한데 사별은 2번이나 한 셈입니다.


푸시킨은 곤차로바를 처음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무시했으나

다음 날,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나며



"나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지 마.

이것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해,

그러니 자유롭게 살아.

그리고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도록 해."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후 쿨럭거리며


"끝장이야... 내 목숨..."


이라고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푸시킨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니콜라이 1세

일반인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하고

신문에 과도한 추모 기사 작성을 금지한다 명했으며

장례식에 군대까지 보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죽음에는

푸시킨을 시기하던 보수적인 귀족들이 음모를 꾸며

푸시킨이 그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푸시킨을 죽인,

그러니까 푸시킨과의 결투에서 승리한 당테스도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 프랑스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보불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축출된 후엔 은둔하며

비참하게 살다가 1895년에 사망했습니다.


낭만주의 문학가인 동시에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도 푸시킨의 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적절히 배양하여

러시아의 국민성과 혼을 문학으로 잘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은 푸시킨이 개척한 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후대 러시아 문학가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미래파와 마야콥스키는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푸시킨을 지목하기도 했지만

마야콥스키는 후에 자신의 입장을 바꿔 푸시킨을 옹호했습니다.




[러시아/러시아 문화]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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